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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란?
환관을 내시라고 하는데요. 환관은 거세된 남성을 뜻합니다. 환관이 되기 전 거세한 사람을 환자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궁에서 일하던 남성을 환관이라 칭하였고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남성을 내시라 칭하였습니다.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후에는 의미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환관 제도는 동아시아 중원과 한반도에서만 존재했으며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존재했습니다. 현대에서는 볼 수 없는 환관에 대해 또 내시 거세방법에 대해 알아봅시다.
환관(내시)가 되는 과정
내시의 기본 조건은 거세한 남성입니다. 선천적 환자가 아닌 이상 음경과 고환이 있는데 이것들이 없어져야 내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없어지는 과정과 관련한 국내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실제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 특수 사정에 의해 강제로 거세
2. 우연적 사고로 인한 환자
3. 선천적 환자
4. 스스로 자르거나 남에 의해 잘린 자
고려시대 같은 경우 위의 4가지 경우에서 선발했습니다.
내시 거세방법
음경과 고환을 자르거나 고환만 자르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고환 절제는 그렇다 쳐도 음경까지 절제하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 비뇨기과 전문의에 따르면 음결 절제술은 지금도 하기 어려운 수술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옛날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수술이었겠지요.
자세히 설명할수는 없지만 잔인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낫 모양의 휘어진 작은 칼로 음경과 고환을 동시에 잘라내고 나무못을 요도에 꽂습니다. 수술 직후 수술 집도자가 환자를 부축해 두 세 시간 정도 방안에서 걷게한 후 다시 눕히고 3일동안 물을 마시지 않게 한 뒤 요도에 꽂은 나무못을 뽑습니다.
그러면 분수처럼 방뇨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수술이 성공한 것입니다. 수술 후 100일 정도 지나면 상처가 아뭅니다. 이후 왕부로 옮겨져 환관의 실무를 1년정도 습득한 뒤 궁으로 들어가 새로운 직책을 부여 받습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나 한반도 지역에서도 비슷할거라 추측할 뿐 확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스스로 거세했다는 사료가 없습니다. 조선 건국 직전 명나라에서 고려 조정에 강제로 거세해 명나라로 환관을 차출하는 방식을 금하라고 명령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든 조선이기에 선천적 환자나 사고 환자를 환관으로 선발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것이 환관이 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해요. 선발이 어려울 수 있어서 성종, 연산군, 중종 대에 환자를 궁궐 밖에서 부리는 것을 금지 하기도 했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선발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전기에 환관 수는 10여명, 조선의 환관 수는 140명으로 규정하였고 그 후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청나라의 환관은 적을 때는 3천명, 많은 때는 1만 2천명이었으며 명나라 말기에는 10만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중원 지역의 환관은 일단 임용이 되면 권력과 부를 얻기 쉬웠기 때문에 하층민이 신분 상승을 노리고 스스로 거세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자금성 서문 밖에 수술실을 만들어 국가 공인 도자장이 수술을 전담하기도 했습니다.
내시 거세해야만 하는 이유
환관이 환자여야만 하는이유는 황제의 후궁을 겸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가 첫번째 이유이고 두번째 이유는 음양관점의 이유입니다. 음은 여성 성을, 양은 남성 성을 뜻하는데요. 황제는 양의 기운이 강해야 하는 위치였고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서는 음의 기운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거세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관을 관직 받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환관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환관의 위세는 또한 실로 대단했습니다. 일단 왕과 가깝고 왕의 재산 관리를 해주는 중요 직책이었으므로 위세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 한, 당나라, 고려의 부패 원인이 환관에 있다고 볼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관료들은 공민왕 대부터 환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였으며 조선 건국후 법제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내시부의 역할은 궁궐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청소, 궐문 감시로 한정되게 되었습니다.
내관의 품계는 7품 이하로 낮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환관을 정치로부터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관의 부귀 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조선 후기 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반증으로 봐주기도 하였습니다.
내시는 가족이 있었을까?
환관의 부모 외에 환관이 중심이 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2명 중 1명 이상은 혼인도 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부부 생활은 어렵지만 부인이 존재했고 그것은 환관이 궁궐 업무를 볼 때 뒷바라지해 줄 집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환관은 환자를 데려다 양자로 삼기도 했습니다. 양자가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가족과 완전히 연을 끊고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때 목숨 걸고 선조를 보필한 내신 김계한은 13대까지 환관을 배출했습니다.
환관이 외간 남성에게 있는게 없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으나 그 시대적 상황으로 봤을 때 의미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양반들은 환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흉측하여 실로 인간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양반들이 많았지요.
내시의 수명은 길다?
놀랍게도 환자가 됐을 때 수명이 평균보다 길었다고 합니다. 내시 족보에 나온 777명 중 출생일과 사망일을 알 수 있는 81명의 내시들은 양반 족보에 오른 2589명의 수명과 비교했을 때 양반 남성의 평균 수명은 51~56세였지만 내시의 평균 수명은 70세 이상으로 장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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